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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사랑꾼" 미암 유희춘의 길을 따라

미암 유희춘은 중종 8년 아버지 유계린과 어머니 최씨사이에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지역에서는 나름 학자집안으로 덕망이 높았다. 26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선조를 가르쳤다.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 입은 바 크다"고 했다. 35세 때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된다. 그 곳에서 19년간 독서와 저술에 몰두한다. 53세 때 충청도 은진으로 이배되었다. 2년 후 선조가 즉위하자 복직되어 대사성, 부제학을 거친 후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63세에 처가집이 있는 담양으로 낙향한다. 부제학시절 유희춘은 경연에서 특출한 실력을 보여 "경전은 모르는 것이 없고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선조는 유희..

역사기행 2021.07.24

"조선 최고의 시인" 송강 정철의 파란만장한 길을 따라

송강은 동년부 판관 정유친과 죽산 안씨 사이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누이가 계림군과 결혼하여 어릴때 부터 궁중 출입이 잦은 연유로 어린명종과 친분을 쌓았다. 10세 때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연루되어 아버지가 함경도로 유배되었고 16세 때(명종6년) 해배되자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남도 창평으로 이주 후 10년을 보낸다. 이곳에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과 같은 대학자와 교류하였으며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과 함께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의 문하생이 되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는데 이 노래는 서하당과 식영정 주위의 사계절의 경치와 김성원의 삶을 그리고 있다. 27세 때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40세에 성균관 사간을 역임했다. 이때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역사기행 2021.07.23

"술에 살고 술에 죽은 선비시인" 서파 오도일의 길을 따라

인종 23년 오도일은 전참 오달찬과 심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6세때 친모는 돌아가시고 서모 한양조씨가 길렀다. 한양 조씨는 우리나라 3대 여성문학사의 한명으로 손꼽히고 있어 글재주는 어머니의 영향을받은 것 같다. 어머니 한양 조씨는 시아버지를 정성과 공경을 다해 섬기고 전부인이 낳은 두아들을 자신의 아들과 차별없이 보살폈다. 또 아랫사람들을 관대하고 자애롭게 대했다. 영의정을 지낸 시아버지는 우리며느리는 사군자라고 칭찬했다고 서파집은 전한다. 한양 조씨는 지방수령으로 파견되었던 남편이 40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궁핍한 살림에도 오도일이 총명함을 알고 한양으로 올라와 학문에 정진케 한다. 28세 때 문과에 급제 41세 때 승지에 올랐으나 당파에 휩쓸려 파직된다. 그 후 복직되어 49세 때 강원도 관찰사..

역사기행 2021.07.22

"유배생활만 22년, 천하제일 시인이 되다" 소재 노수신의 길을 따라

노수신은 중종 10년에 태어나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시를 잘 지었다. 29세에 식년문과에 초시,회시,전시 모두 장원급제를 하고 시강원사서가 되어 퇴계 이황과 함께 세자(명종)에게 강론을 하고 중종이 승하하자 행장을 지을만큼 글솜씨가 뛰어났다. 31세 때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영의정 이익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는데 이일이 기나긴 유배의 단초가 된다. 중종말 조정은 윤임과 윤원형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노수신은 이조정랑을 역임하면서 사림파인물을 많이 등용시킨다. 인종이 즉위 후 8개월만에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외척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노수신을 충주로 3년 후 전라도 순천을 거쳐 진도로 이배시켜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가 시작된다. 주자의 책에서 "내가 내책을 읽으니 병이 낳..

역사기행 2021.07.21

"항일운동의 끝판왕, 행동하는 지성" 면암 최익현의 길을 따라

면암은 순조시대 경기도 포천에서 가난한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함을 안타까이 여긴 아버지는 그의 나이 13세때 경기도 양평으로 귀양와 있던 성리학의 대학자 이항로에게 보낸다. 당쟁으로 벼슬길에 관심이 없던 다른 문하생과는 달리 면암은 22세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26세), 예조좌랑(31세), 성균관 직강(32세), 사헌문 장령(35세)의 관직을 거친다. 35세 때 흥선대원군의 경북궁 중건을 비판한 상소를 시작으로 일생동안 36개의 상소를 올릴정도로 꿋꿋한 선비의 길을 간다. 40세 때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가져온 계유상소로 제주도로 유배를 갔으나 고종의 절대적 신임으로 1년반만에 풀려난다. 제주도 유배생활은 곧 돌아갈 조정의 실력자인지라 지역사람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하고 ..

역사기행 2021.07.20

"짧고 굵직하게 개혁의 아이콘" 정암 조광조의 길을따라

조광조는 조선 성종때 감찰이었던 조원강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학문에 대한 욕심도 컸다 16세때 평안도 영변의 지방관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 곳에 유배와 있던 김굉필의 제자가 된다. 벼슬에는 큰 뜻이 없어 성리학에 매진하여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맥을 이어받았고 요순시대의 이상정치인 도학정치를 꿈꾼다. 33세때 뒤늦게 특별과거인 알성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중종의 눈에 띄면서 3개월 후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다. 이때 상소를 올린 두 신하를 벌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들을 두둔하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사간원 전원을 파직하라는 주장을 관철시켜 하루아침에 사림의 영수로 존경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중종은 반정공신의 힘을 빼기 위해 조광조를 신임하게 된다. 36세때 대..

역사기행 2021.07.17

"조선후기 서예시장의 완판남 " 원교 이광사의 길을 따라

조선4대 명필로 손꼽히는 원교 이광사는 조선 2대 정종의 후손으로 조부, 백부, 부친이 판서이상을 지낸 명문가, 명필가의 집안이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 후 노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집안이 몰락한다. 17세 되던해 부친이 밀양에서 유배 중에 사망하고 벼슬길이 막히면서 학문정진과 서예의 길을 선택한다. 당시 금기시했던 학문 양명학을 배우기 위해 정제두의 제자가 되었으며 서예는 윤순에게 사사하여 동국진체의 계보를 잇는다. 51세 때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하던 중 "하늘을 향해 내게는 뛰어난 글솜씨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통곡하자 영조가 불쌍히 여겨 함경북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부인 문화류씨는 남편이 옥중사망했다는 소식을 잘못 전해 듣고 삼남매를 살리기 위해 대들보에 목을 메..

역사기행 2021.07.16

"절해고도에서 탄생한 최초 어류 백과사전" 정약전의 길을 따라

미운털이 가장 많이 박힌 사람은 제주도와 흑산도 중 어디로 유배를 보낼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거리는 비슷한 대신 제주도는 큰 섬이라 먹을 것도 더 풍족하고 인간관계나 문화도 더 풍요로운 조건이다. 지금도 흑산도는 쾌속선으로 목포에서 2시간 거리이고 도초도까지는 다도해 섬들이 바람막이가 되어주나 특히 도초도 이후 1시간은 풍랑이 심한 먼바다라서 왠만한 사람은 배멀미가 100%이다. 옛날에도 우이도(소흑산도)에서 날 좋은 날로 골라 출발하여 돛단배로 5일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도 겨울에는 풍랑이 심하여 흑산도 주민들은 육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에 돌아갈 정도로 생활여건이 매우 좋지 않은 절해고도이다. 정약전은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의 4살터울 위의 형으로 다산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이들 형제는 ..

역사기행 2021.07.14

"풍류를 즐기려면 이 정도는 돼야" 고산 윤선도의 길을 따라

절대권력을 가진 권문세도가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는 것은 실패를 예견하고 보복을 감수해야 할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보여준 우유부단한 왕 선조시절, 비주류 남인의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세력인 서인에 맞서 왕권강화를 줄기차게 주장하다 이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20년의 유배와 19년의 은거생활로 생을 마친 고산 윤선도의 길을 따라가 본다.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동은 몇년, 그는 그다지 벼슬에 뜻을 두지는 않은 것 같다. 간신 이이첨을 멀리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상도 기장 등으로 유배를 갔다. 한양으로의 복귀를 기대하고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는 다른 유배인과는 달리 가는 곳마다 시와 풍류로 시간을 보낸 듯하다. 정권이 바뀌어 나라에서 몇 번의 벼슬을 내렸어도 ..

역사기행 2021.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