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조선후기 서예시장의 완판남 " 원교 이광사의 길을 따라

김성완의 블로그 2021. 7. 16. 15:53

 조선4대 명필로 손꼽히는 원교 이광사는 조선 2대 정종의 후손으로 조부, 백부, 부친이 판서이상을 지낸 명문가, 명필가의 집안이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 후 노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집안이 몰락한다. 17세 되던해 부친이 밀양에서 유배 중에 사망하고 벼슬길이 막히면서 학문정진과 서예의 길을 선택한다. 당시 금기시했던 학문 양명학을 배우기 위해 정제두의 제자가 되었으며 서예는 윤순에게 사사하여 동국진체의 계보를 잇는다. 51세 때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하던 중  "하늘을 향해 내게는 뛰어난 글솜씨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통곡하자 영조가 불쌍히 여겨 함경북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부인 문화류씨는 남편이 옥중사망했다는 소식을 잘못 전해 듣고 삼남매를 살리기 위해 대들보에 목을 메어 자살한다. 원교는 한달 뒤 유배지에서 이 소식을 듣고 도망(죽은 부인을 애도함)이라는 시를 쓴다.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리라/ 당신의 한도 그러하리니/ 두 한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조선시대 사모곡 중 가장 구구절절하다. 후에 이광사가 죽자 자식들은 경기도 장단면에 있던 문화유씨의 묘와 합장하였으나 지금은 비무장지대안에 있어 찾을 길이 없다.

 

  함경도 부령의 유배지에서 문인에게 글, 글씨를 가르치는 것이 못마땅한 노론세력은 원교가 58세되던 해 전라남도 신지도로 이배 시켜 이곳에서 73세의 나이(야인30년 유배 23년)에 생을 마친다. 신지도의 유배기간 중 이광사는 동국악부(단군 ~ 두문동에서 은거한 고려충신들의 30가지일화)를 저술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장남 이긍익은 연려실기술(태조 ~ 현종까지의 사실그대로를 쓴 역사서로 사료적 가치가 높음) 59권42별책을 30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연려실 이긍익은 조부는 처형, 모친은 자결, 부친은 기나긴 귀양살이를 하는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벼슬길을 단념하고 역사에 몰두하였다. 신지도에서 그의 나이 42세 때부터 죽을때까지 30년간의 세월이 걸려 연려실기술을 완성했다. 기존의 야사가 자료수집에 소홀하고 산만하며 역사가 왜곡되어 서술하였다면 연려실기술은 선배학자의 기술을 그대로 옮긴 후 사료의 출처를 밝히고 시간 단위(편년체)가 아닌 사건의 전말을 밝힐 수 있도록(기말전도체) 전개하였다. 이긍익은 "내가 자료를 얻어 보지 못하여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은 후일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데로 글을 보완하여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라고 쓰고 실제로 본문 여백을 두어 후세 사람이 추록하도록 하였다.

   불우한 역사학자가 남긴 방대한 野史는 후세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역사서가 되었다

 

원교는 신지도에서 보물로 지정된 서예이론서 "서결"를 4년에 걸쳐 집필하였다. 서결에서 "서법은 살아 움직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 움직이면 정해진 모양이 없다"라 하였으며 이규상은 병세재언록에서 "사람들은 원교의 글씨가 경악스럽다고 많이 헐뜯지만 그 것은 액운이 많이 싸인 불편한 심기가 원교의 기이하고 뛰어난 붓끝에서 울려나온 것"이라 평하였다. 이렇듯 파격적인 글씨는 당대에도 호불호가 심했다. 이규상은 "당대 독보적인 인기로 날을 잡아 서장을 열면 글씨를 받으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원교는 하루종일 붓을 휘둘렀는데 마치 소나기 쏟아지듯 장관을 이뤘다.

원교는 그동안 중국서체를 모방했던 것에서 탈피한 독특한 동국진체를 완성하여 이 서체가 호남을 출발하여 수도권으로 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명성으로 전라도의 내노라는 절에 그의 현판 글씨가 많이 남아있다.  대흥사, 내소사 대웅전, 선운사 천왕문, 천은사 일주문, 강진 백련사 대웅전, 만경루. . . .

 

 원교 이광사가 쓴 편액여헹)

천은사 원래 이름은 감로사였는데 숙종때 개축하면서 샘의 구렁이를 잡아 죽이자 샘이 사라졌다하여 泉隱寺(샘이 숨었다)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이후 원인모를 화재가 자주 일어나자 마을사람들은 절의 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때문이라고 두려워했다. 이에 이광사가 물 흐르듯이 쓴 편액을 붙인 후로는 다시는 불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고요한 새벽에는 편액에서 신비롭게도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제주도 귀양길에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보고 중국의 서체를 모방하여 촌스럽다고 디스하고 당장 떼어내라고 초의에게 부탁한다. 그후 9년간의 혹독한 제주 귀양살이 덕분에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추사는 원교체의 진가를 알아보고 다시 걸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완도타워에서 본 완도항

 

 해안선 타고 완도 본섬 여행)

청해진유적지 -> 명사십리 해수욕장(원교 유적지) -> 완도타워 -> 정도리 구계등 -> 청해포구 촬영세트장 -> 완도수목원 

주) 정도리 구계등 : 몽돌해변으로 멀리서 보면 자갈밭이 9개의 등을 이룬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안가 데크를 걸어 몽돌해변을 감상하고 방품림 속의 시원한 그늘로 되돌아오면 된다. 일출, 일몰, 한밤의 달빛도 운치가 이있는 곳이다.

주) 완도수목원 : 국내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이다. 각 수종에 따라 30개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각종 체험을 할 수 있다. 수목원 내에 둘레길이 1시간에서 2시간 등 능력에 따라 선택할 수 있으며 상황봉 등산코스(5시간)도 있다. 휴양림에서 1박하면서 차분하게 수목원을 둘러보는 것도 강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