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은 동년부 판관 정유친과 죽산 안씨 사이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누이가 계림군과 결혼하여 어릴때 부터 궁중 출입이 잦은 연유로 어린명종과 친분을 쌓았다. 10세 때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연루되어 아버지가 함경도로 유배되었고 16세 때(명종6년) 해배되자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남도 창평으로 이주 후 10년을 보낸다. 이곳에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과 같은 대학자와 교류하였으며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과 함께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의 문하생이 되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는데 이 노래는 서하당과 식영정 주위의 사계절의 경치와 김성원의 삶을 그리고 있다.
27세 때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40세에 성균관 사간을 역임했다. 이때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담양으로 낙향한다.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강원도지역을 돌면서 관동별곡을 지었다. 48세 때 대사헌에 올랐으나 동인의 탄핵으로 담양으로 돌아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니곡 등의 가사와 한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에서 참된문장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세편뿐이다"라고 칭송할정도였다.
54세 때(선조 20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선조의 명을 받아 많은 동인들을 제거했다.
56세 때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했으나 선조의 노여움을 사 "대신으로 주색에 빠져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파직된 후 진주,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특별사면이 되자 왕을 호위하여 의주까지 피난을 갔고 58세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나 동인의 모함으로 강화도로 귀양을 가 파란만장한 생을 마친다. 거친성정으로 평생 정적들과 싸웠지만 청렴결백하여 말년에는 끼니를 잇기 힘들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 죽은 후에도 당쟁에 따라 사탈관직, 복구를 3차례 하는 등부 침을 거듭했다.
선조는 "정철은 마음이 바르고 행실은 모나지만 그 혀가 곧기때문에 세속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독한 음주습관에 대낮에도 사모가 늘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었고 임금이 불러도 술때문에 등청하지 못한적도 있었다. 때문에 선조가 은잔을 하사하여 "하루에 이잔으로 한잔씩만 마셔라"하였으나 술잔을 사발만큼 크게 늘려서 마셨다고 한다.
술을 좋아했던 송강이 썼던 "장진주가"이다
술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 꽃나무 가지 꺽어서 잔 수를 헤아리며 먹세그려 /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위에 거적으로 덮어서 졸라매고 가든 /
아름답게 꾸민 상여 뒤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뒤따르든 /
억새, 속쇄, 떡갈나무, 백양 숲(무덤)에 가기만 하면 /
누런 해, 흰달, 굵은 눈, 소슬바람 불때 누가 한장 먹자할까 /
하물며 원숭이가 무덤위에서 휘파람불때 뉘우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담양 정자여행)
환벽당 -> 가사문학관 -> 식영정 -> 소쇄원 -> 명옥헌원림 -> 메타쉐콰어어길, 프로방스 -> 관방제림 -> 죽녹원
주) 관방제림 : 조선인조 때 성이성부사가 수해방지 목적으로 폭7m로 제방을 쌓고 철종5년에 황종림부사가 인부를 연 3만명이나 동원하여 조성한 숲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큰 나무는 성부사가 심었고 작은 나무는 황부사가 심은 것이라 한다. 푸조나무가 주를 이루고 느티나무, 팽나무, 벚나무, 음나무, 개서어나무 순으로 많다.
Tip) 담양은 너무 많이 알려진 여행지여서 루틴하게 이동거리를 최소화하여 코스를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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