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권력을 가진 권문세도가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는 것은 실패를 예견하고 보복을 감수해야 할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보여준 우유부단한 왕 선조시절, 비주류 남인의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세력인 서인에 맞서 왕권강화를 줄기차게 주장하다 이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20년의 유배와 19년의 은거생활로 생을 마친 고산 윤선도의 길을 따라가 본다.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동은 몇년, 그는 그다지 벼슬에 뜻을 두지는 않은 것 같다. 간신 이이첨을 멀리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상도 기장 등으로 유배를 갔다. 한양으로의 복귀를 기대하고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는 다른 유배인과는 달리 가는 곳마다 시와 풍류로 시간을 보낸 듯하다. 정권이 바뀌어 나라에서 몇 번의 벼슬을 내렸어도 형식적으로 응하거나 거절하였다. 학문의 깊이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한때 봉림대군(후에 효종)의 스승을 지냈다. 고산은 병자호란 때 어가가 강화도로 피신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이끌고 노를 저어 해상으로 강화도로 출발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부끄러히 여기고 세상을 버리고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의 경치에 반하여 그만의 세계를 여기에 건설하였다. 격자봉에 올라 주위를 살펴본 후 고산의 말이다.
"산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천석이 참으로 아름다워 물외의 가경이요 선경이라.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고산은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깊어 나중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묘자리를 현 사도세자의 왕릉자리로 지정하였으나 노론의 수장 송시열의 반대로 무산이 되었다. 후에 정조는 이곳이 명당임을 알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로 썼다. 이만큼 천문지리, 풍수에 해박한 고산이 은거지로 정한 곳도 풍수를 감안하여 가장 좋은 길지였음이 짐작된다.
1일차) 해남 녹우당 : 해남 윤씨의 고택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 중 한군데라고 한다. 덕음산 산자락을 뒤로 하고 앞이 탁트인 양지바른 곳이어서 우선 편안함을 느낀다. 고산의 고조부 윤호정은 해남지역의 토지 1/4을 소유할 정도로 대부호였다고 한다. 이러한 부의 대물림으로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녹우당이 보유한 많은 책이 있었기에 지역 문화의 산실로 다산 정약용(공재선생의 외손자)도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차, 그림에 조예가 깊은 남도 지식인들과 교류가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윤선도 유물박물관 - 30분> 교과서에서 많이 봤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이 실제 별로 크지 않음에 의외이다. 강렬한 눈빛과 섬세한 볼 수염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촬영금지라는 안내푯말에도 몰래 사진을 찍었으나 인영본이었고 원본은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 한다.
<녹우당 주변산책- 1시간>녹우당이란 효종이 즉위 후 집을 지어 고산에게 하사하였고 고산이 해남으로 이주 후 사랑채를 수원에서 가져왔다. 뒷편의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이 바람에 일렁이면 마치 비가 오는 소리같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2일차) 보 길도 윤선도 원림 : 세연정이란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상쾌해진다는 뜻이다.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정원을 꾸며 한국 3대 정원중의 하나라 한다. 이 작은 연못에서 아름다움, 자연과 조화, 풍류, 지혜등을 엿 볼수 있다.
보통 보길도를 방문하면 시간관계상 또는 알지 못하여 세연정만 보고간다. 나도 몇 차례의 방문 끝에서야 부용동에 갔다. (세연정과 차로 5분거리) 고산은 부용동 정원에 낙서재를 짓고 생활을 하고 지루하면 건너편 산 중턱에 동천석실에서 잠시 기거했다고 한다. 산위에서 보면 마을이 연꽃같다하여 부용동이라 하였다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동네사람의 말을 빌리면 도르레를 이용하여 부용동에서 동천석실까지 술 안주 등 물건을 날랐다하니 얼마나 호화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백성을 착취하여 호사로운 생활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그 것은 아닌 듯하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내돈내산으로 산 삶이다. 삼성 이병철의 고향 의령사람들은 덕분에 취직도 하고 동네 발전도하고 그를 존경하지 않은가? 그의 나이 65세때 어부사시사를 지었는데 당시 보길도사람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한문투의 어부가를 불렀는데 영 발음도 입에 맞지않고 어색하여 어부들의 살아있는 언어로 재 탄생한 것이 어부사시사라 한다. 또한 가난한 백성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간척사업을 하여 농사를 짓게하였는데 이는 진도 임회면에 있는 유선도 사적지를 방문하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어부사시사 <춘사8>
술에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아래 내려가다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 잎이 흘러오니 무릉도원이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인간세상의 붉은 티끌이 얼마나 내 눈을 가렸던가
송시열 글씐바위 : 고산의 정적인 우암 송시열도 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태풍을 만나 보길도에 잠시 머물렀다. 이때 송시열은 풍토병에 걸려 몸져 누웠는데 고산이 그 곳에 있는 줄 알고 아들에게 고산에게 약을 지어오라고 명했다. 아들은 탕약에 독약이라도 타면 무슨 변고냐며 주저하였으나 우암은 고집을 부렸고 이에 고산은 정성을 다해 탕약을 지어보내 병을 이겨냈다고 한다.. 지금같아서는 둘사이 철천지원수로 살았겠지만 옛사람들은 정책대결로 싸울때는 싸우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은 것 같다. 제주도로 가는 바닷가 바위에 우암은 글씨를 새겼다. 낙서재의 반대편인 것 같으며 가는 길이 여름에도 시원하고 정감이 있는 옛길이다.
(TIP. 시간여유가 있으면 보길도에서 1박하면서 예송해변 일출과 격자봉 등산을 추천한다. 보길도는 우리나라 최대 동백 자생지이다)
3일차) 금쇄동 : 고산은 84세의 나이에 보길도 낙서재에서 별세하였으며 금쇄동에 고산의 묘가 있다. 이곳은 육지에 건설한 윤선도의 또 하나의 이상향이며 보물로 지정된 산중신곡집을 여기에서 저술하였다. 대흥사 가는 길에서 20여분만 가면 입구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한다.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복원사업(십 몇년째 복원 중?)을 하는 중이라 형태만 짐작할 수 있다. 한없이 이어지는 요즘 보기힘든 비포장길과 맑은 공기에 하루 빨리 복원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져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면 한다(연세가 있거나 고산에 관심이 없는 분은 실망할 수 있어 비추)
(TIP. 대흥사와 보길도 가는길(땅끝선착장)에 달마산 미황사, 도솔암 방문을 추천한다, 달마산 둘레길을 장비없이 스님들이 손수 만든 달마고도는 총 길이 18km로 구간으로 나누어 산책이 가능하고 도솔암은 좁은 산길로 평일에는 코밑중계탑까지 차량운행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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