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26

"마마(천연두)로부터 아이들을 구한 醫人" 송촌 지석영의 길을 따라

조선시대에는 인구의 50%가 아동기 이전에 죽었고 그 중 40%는 천연두때문이라 한다. 혹 살아남아도 65 ~ 85%는 얼굴이 얽어 흉해지거나 실명하게 된다. 이렇게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신념하나로 일생을 보낸 인물이 있다. 1855년 철종 때 송촌 지석영은 한의사인 지익룡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서양의술에 관심이 많아 부친의 친구 박영선으로 부터 의학을 공부했다. 21세때에 스승 박영선이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귀감'이라는 책을 건네받아 이를 전수받았다. 25세 때 부산으로 내려가 일본인 제생의원 원장으로부터 어렵게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천연두 예방백신)와 침을 얻어 처가집으로 향한다. 펄펄뛰는 장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살된 처남..

역사기행 2021.07.30

"격동의 구한말, 신념의 의병장" 돈헌 임병찬의 길을 따라

돈헌은 구한말(1851년)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향리출신으로 17세에 옥구호방, 22세에 호장이 되었다. 그는 수완이 좋아 향리시절 재산을 많이 모았다. 38세에 전라도에 큰 기근이 일어나 돈 4천냥(현 4억정도)과 쌀 70석을 기부하여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낙안군수에 제수된다. 군수시절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막고 민생안전을 도모하였으나 조정에서 수수방관하자 재임 2년후 사임하고 43세에 정읍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한다. 44세에 동학혁명이 일어나 마을사람들이 동요하자 동학에 가담하지 말고 임금에 충성하라고 당부한다. 45세에 동학 접주 김개남이 태인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아에 고발하여 체포케 한다. 그 공으로 임실군수직과 쌀 20석을 ..

역사기행 2021.07.29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개혁가" 삼봉 정도전의 길을 따라

정도전은 1342년 고려말 형부상서 정원경과 영주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의 제자가 된다 이색은 "벼슬에 나가면 해야할 일은 반드시하고 어떤일을 당해도 회피할 줄 모른다"고 칭찬하였다.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목의 사록에 임명되었고 30세에 성균관 학사의 추천으로 성균박사(정7품)에 임명되어 정몽주와 함께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33세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명나라에 이를 고할 것을 주장하여 친원파인 문하시중 이인임의 미움을 산다. 34세 때 원나라에서 명나라를 협공하기 위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사신 영접사로 임명이되자 사신의 목을 베겠다하여 전라도 회진현으로 귀양을 갔다. 정도전은 '소재동기'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부곡민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리 사람들..

역사기행 2021.07.28

"매화에 미친 묵장의 영수" 우봉 조희룡의 길을 따라

우봉 조희룡은 1789년 정조 때 경기도 양주의 부유한 중인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25세에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오위장(종2품 왕과 궁궐을 호위하는 지책의 우두머리) 까지 지냈다. 그는 문인화를 공부하면서 자신보다 3살 위인 김정희에게 서예, 난 치는 법 등을 배운다. 우봉은 시, 글씨, 그림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글씨는 추사체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 특히 매화를 많이 그렸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다. 58세 때는 헌종의 명으로 금강산에 가 명승지를 그려왔으며, 명종은 회갑을 맞은 우봉에게 특별히 벼루를 하사하기도 했다. 60세 되던해 우봉은 서예가, 화가들을 이끌고 추사를 찾아가 작품평을 요청하였다. 유재소의 '추수계정도'를 본 추사는 "원나라 문인의 화..

역사기행 2021.07.28

"유배지에서 피어난 애절한 사랑" 정헌 조정철의 길을 따라

정헌 조정철은 영조27년 호조참판 조영순과 안동김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24세 때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그의 나이 27세 때 정조시해 미수사건에 장인이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조정철은 원래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충신이었던 증조부 조태재 덕분에 목숨만은 부지하였다. 유배지에 도착하자 당시 제주판관은 개인적인 원한으로 조정철이 책을 읽는 것조차 금지하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부친의 3년상도 끝나지 않았고 부인의 자결소식에 참담한 심정으로 일체 바깥출입을 삼가고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유배 3년째 되던해 그를 사모하던 마을 향리의 딸 홍윤애가 헌신적인 사랑으로 보살펴 평정을 찾던 중 할아버지 때 부터 집안 원수지간이던 정적 이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조정철을 죽일 ..

역사기행 2021.07.27

"만언사, 간절함이 기적을 만들다" 안조원의 길을 따라

곧 한양으로 돌아갈 권력층의 유배나 학식이 높은 학자의 유배생활은 관가나 지역유지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죄지은 중인들의 유배는 지역민들이 떠 맡기를 꺼려하여 천대와 멸시속에서 생활고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안조원의 출생과 사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수없다. 다만 정조 때 궁중의 잡무를 담당하는 대전별감을 지내다가 34세 때 임금의 도장을 몰래 사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발각되어 추자도로 유배된다. 안조원은 추자도는 기후가 사납고 맹수, 독충이 우글거리며 식량이 부족하여 섬의 인심과 풍속이 거칠대로 거친 하늘이 만든 지옥이라고 만언사에서 묘사했다. 모두들 이핑계 저핑계로 유배죄인을 떠 맡길 꺼려하여 관원은 힘 없는 집에 안조원을 떠 맡긴다. 주인은 저항은 못하고 그릇을 내동이..

역사기행 2021.07.27

"성리학의 참 뜻을 실천한 선비" 한훤당 김굉필의 길을따라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면 성현에 이를수 있고 남을 위한 학문을 하면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와 녹을 얻는 것을 꾀할 뿐이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제 사문이 불행하여 哲人이 서거하였다. 한원당 김굉필을 모신 옥천서원기에서 고봉 기대승이 추모한 글이다. 김굉필은 단종2년 아버지 김뉴와 어머니 청주 한씨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모두 피했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정여창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30세가 될 때까지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칭하며 소학만을 공부하며 修己하였는데 김종직은 "성인이 될 바탕이 있다"고 김..

역사기행 2021.07.25

"조선시대 최고의 사랑꾼" 미암 유희춘의 길을 따라

미암 유희춘은 중종 8년 아버지 유계린과 어머니 최씨사이에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지역에서는 나름 학자집안으로 덕망이 높았다. 26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선조를 가르쳤다.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 입은 바 크다"고 했다. 35세 때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된다. 그 곳에서 19년간 독서와 저술에 몰두한다. 53세 때 충청도 은진으로 이배되었다. 2년 후 선조가 즉위하자 복직되어 대사성, 부제학을 거친 후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63세에 처가집이 있는 담양으로 낙향한다. 부제학시절 유희춘은 경연에서 특출한 실력을 보여 "경전은 모르는 것이 없고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선조는 유희..

역사기행 2021.07.24

"조선 최고의 시인" 송강 정철의 파란만장한 길을 따라

송강은 동년부 판관 정유친과 죽산 안씨 사이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누이가 계림군과 결혼하여 어릴때 부터 궁중 출입이 잦은 연유로 어린명종과 친분을 쌓았다. 10세 때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연루되어 아버지가 함경도로 유배되었고 16세 때(명종6년) 해배되자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남도 창평으로 이주 후 10년을 보낸다. 이곳에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과 같은 대학자와 교류하였으며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과 함께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의 문하생이 되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는데 이 노래는 서하당과 식영정 주위의 사계절의 경치와 김성원의 삶을 그리고 있다. 27세 때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40세에 성균관 사간을 역임했다. 이때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역사기행 2021.07.23

"술에 살고 술에 죽은 선비시인" 서파 오도일의 길을 따라

인종 23년 오도일은 전참 오달찬과 심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6세때 친모는 돌아가시고 서모 한양조씨가 길렀다. 한양 조씨는 우리나라 3대 여성문학사의 한명으로 손꼽히고 있어 글재주는 어머니의 영향을받은 것 같다. 어머니 한양 조씨는 시아버지를 정성과 공경을 다해 섬기고 전부인이 낳은 두아들을 자신의 아들과 차별없이 보살폈다. 또 아랫사람들을 관대하고 자애롭게 대했다. 영의정을 지낸 시아버지는 우리며느리는 사군자라고 칭찬했다고 서파집은 전한다. 한양 조씨는 지방수령으로 파견되었던 남편이 40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궁핍한 살림에도 오도일이 총명함을 알고 한양으로 올라와 학문에 정진케 한다. 28세 때 문과에 급제 41세 때 승지에 올랐으나 당파에 휩쓸려 파직된다. 그 후 복직되어 49세 때 강원도 관찰사..

역사기행 2021.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