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기네스북에 오를.. 조선 최초" 교산 허균의 길을 따라

김성완의 블로그 2021. 7. 31. 19:11

  1569년 선조2년 강릉에서 초당 허엽의 세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허성, 허봉, 누이 허난설헌이 있는데 이들 모두 시와 문장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당대에도 '허씨 5문장'으로 불렸다. 그러나 모두 순탄치 않은 삶을 살고 단명하였다.

28세에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29세에 황해도도사(관찰사의 참모)가 되었다. 이 때 서울 기생을 끌어들여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파직을 시작으로 10년 동안 파직 6번 유배 3번의 기록을 세운다.  38세에 삼척부사 재임시 승복을 입고 제를 지냈다는 이유로 부임 두달만에 탄핵당한다. 이에 '파직소식을 듣고 짓다'라는 시에서

예교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오 / 잘 되고 못되는 건 정에 맡길 뿐 / 그대들은 법에 따르라 / 나는 나 스스로 나의 삶을 살아가리라 / 라고 평소 생각을 드러낸다.

 

  39세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당한 후 부안에 내려왔다가 소울 메이트 기생 매창을 만난다. 매창은 그의 누이와 함께 조선 3대여류시인으로 38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나중 부안에 유배되어 무덤을 찾아 매창을 애도하는 시를 짓는다.

 아름다운 시는 비단을 펼친 듯 / 청아한 노래에 구름도 쉬어가네 / 복숭아를 훔쳐 인간으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가지고 인간을 떠났구려 / 부용꽃 휘장엔 등불이 어둑하고 /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남아있을 터 / 다음해 복사꽃 필 무렵에 / 뉘라서 설도의 무덤을 찾아오려나 /  <매창의 묘와 허균이 쓴 시비는 부안 중앙공원에 있음>

 

  42세에 시관으로 전국 향시 시험감독 업무 중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과 부안으로 유배된다.  '좋구나 유배살이'라는 시에서 그의 심정을 말한다.

번요한 인생살이 한가한 날 없더니 / 유배와서야 세상사 끊고 기쁨 얻었네 / 푸른 나무는 아지랑이 머금어 봄 풍경 단장하고 / 복숭아는 찬비 맞아 한낮기운 서늘하네 /

 

  함열의 유배지 함라마을에서 '성소부부고'외 70여권의 책을 집필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쓰기 시작하였고 부안으로 이배되어 정사암터에 은거하면서 장편 한문소설 남궁선생전을 집필하였다.

  홍길동전은 백성들이 널리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글로 썼는데 출생에 의해 신분이 정해지는 불평등 타파, 탐관오리들의 징벌, 가난한 백성의 구제, 새로운 이상세계 건설 등 그의 개혁적인 생각이 반영되었고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보통 문집은 사후에 제자나 후손에 의해 남겨진 글을 모아 간행하는데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생전에 4부 64권으로 편집하여 '성소가 쓴 장독덮게로나 쓰일 변변치 못한 글'이라 이름을 지었다. 또한 팔도의 진미와 요리법을 소개한 한국 최초 음식품평서 '도문대작'도 집필하였다.

 

  45 세에 명나라 사신으로 두차례 다녀오면서 사비를 털어 만권이 넘는 책을사서 고향 강릉에 기증한다. 관에서는 누각을 개조하여 호서장서각을 지어 일반에게 개방한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도서관이다. 이 때 가져온 책 중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 등이 있어 한국에 최초로 천주교를 소개하였다.

 

  허난설헌은 불우한 삶을 살다 26세의 젊은나이에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허균은 그녀의 시를 암기하여 사신으로 갈때 명나라에서 출간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최초로 외국에서 한국 시집을 출간한 셈이다. 그 후 숙종때는 일본에서도 출간됐다. 

 

  그는 그 자신을 이렇게 평했다. "권문에 발을 디디면 / 발꿈치가 곧 쑤셔댔고 / 높은 이와 서로 인사할때는 / 몸이 얼어 붙는 듯 뻣뻣해 졌다" / 그는 서얼같은 사회의 비주류와 가깝게 어울리고 주류인 양반사회에 거부감을 가졌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不與世合의 이단아였다. 호민론이라는 글에서 "백성은 향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고, 항민은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하고, 원민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 호민은 한술 더 떠서 반란을 기획한다. 우리나라는 호민의 수가 적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높은 사람이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개탄하였다

 

  48세에 선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장하여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좌참찬으로 승진했다.

  50세에 서얼들과 짜고 조카사위인 의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아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이이첨의 강력한 주장으로 조사도(당사자의 의견청취) 없이 공범들의 의견만 듣고 서둘러서 사형을 집행한 것도 조선 초유의 사건이고, 당시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사후에 복권이 되었지만 허균만 복권되지 못하였다. 임금, 권력층 모두에게 인심을 못얻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싸목 싸목 트레킹 길 추천)

1) 함열 : 익산산림문화체험관 -> 숭림산 태봉골 음식점 -> 익산산림문화체험관(왕복1시간30분)

     완만한 비포장 산길로 산행 후 차로 웅포나루로 이동하여 금강 3대 낙조 감상하길 바람. 강 건너편이 이영애 주연 JSA공동경비구역을 촬영한 서천 신성리 갈대밭이다.

2) 부안 : 내변산주차장 -> 선녀탕 -> 직소폭포 -> 내변산주차장(왕복 1시간 30분)

     계곡을 낀 나무테크길이 이어져 여름에도 시원하며 직소폭포는 수량이 풍부하여 명승지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