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6년(세종18년) 경혜공주는 문종과 후궁 권씨사이에 맏딸로 태어났다. 이듬해 어머니가 세자빈으로 승격됨에 따라 그녀는 동궁인 경복궁 자선당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7세 때 어머니가 남동생(후에 단종)을 낳다가 산욕으로 24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다. 어머니를 잃고도 왕실에는 수많은 어른들이 있었고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숙부들이 잘해주어 궁에서 행복한 생활을 했다.
15세에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왕실에서는 혼사를 서둘렀다. 자칫 국상이 선포되면 3년동안 혼인이 금지되기 때문이었다. 그 해 한성부윤 정충경의 아들 정종(후에 영양위)과 혼사를 치뤘고, 52일 후에 세종이 승하한다. 아버지 문종이 보위에 오르자 그녀는 자동으로 공주가 된다. 문종의 딸사랑은 지극하여 대신의 반대를 무릎쓰고 저택을 지어 하사할 정도였다.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한 달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남동생 단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한다. 그녀의 나이 18세 때였다.
본래 미성년자가 보위에 오르면 성년이 될 때까지 대왕대비나 대비가 섭정을 해야하나 모두 일찍이 돌아가셔서 왕실에는 섭정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세종은 생전에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김종서, 황보인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단종을 부탁했었다. 그때부터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단종을 보위하여 조정을 이끌었다.
19세 때 수양대군은 권남, 한명회 등을 동원해 쿠테타를 일으킨다(계유정난). 이듬해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지만 어린국왕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양대군의 심복들은 수시로 단종에게 양위를 요구하였으며, 단종이 이를 거부하자 1455년 금성대군과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를 죄인으로 몰아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보낸다. 결국 단종은 재위 3년만에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통보하고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경혜공주가 병석에 누워 무언의 시위를 벌이자 공주를 무척 아꼈던 세조는 영양위를 수원으로 이배시킨다. 공주는 짐을 싸 남편을 따라가고 세조는 민심을 의식해서인지 유배생활을 돌봐준다. 20세에 집현전 학자와 성승, 유응부 등이 시도한 상왕복위사건이 발각되었다. 그 결과 사육신들은 능지처참되었고, 영양위와 경혜공주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역적의 신분으로 전락되어 전라도 광주로 이배된다. 그 해 경혜공주는 아들 정미수를 낳는다. 훗날 눈썹이 희도록 오래 살아라고 세조가 지어준 이름이다.
21세 때 유배중이던 금성대군이 상왕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사사된다, 25세 때 영양위는 광주에서 승려 성탄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참당하고 경혜공주는 순천부의 관노가 된다. 졸지에 노비로 전락한 경혜공주는 피눈물을 훔치며 3살난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부로 향한다.
순천부사 여사신은 아침나절 관아 앞마당에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우두커니 북쪽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여종을 보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허나 여종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아이와 함께 대청에 오르더니 여사신을 향해
"나는 이 나라 조선의 공주다. 난데없이 흉사를 당해 이 꼴이 되었지만 너는 선왕의 신하로써 어찌 이토록 무엄한가?"
그 말을 들은 여사신은 깜짝놀라 조용히 일 하는척만 해달라고 당부한다. <연려실기술>
경혜공주는 순천부에 도착한지 사흘만에 정희왕후 윤씨의 도움으로 사면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딸을 낳는다. 그리고 젖을 뗄무렵 공주는 정희왕후에게 두아이를 맡기고 절에 들어간다.
1465년(세조11년) 그녀의 나이 30세, 출가한지 4년 되던 해에 경혜공주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남편을 죽인 원수세조를 찾아가 담판을 짓는다. 경혜공주의 두자녀는 면천이 되고 성종이 즉위 후 정미수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른다. 자신의 아들이 벼슬에 오른것을 본 후 얼마 안되어 38세의 나이에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무등산 최단거리 코스)
수만리 탐방지원센터(해발 480m) -> 장불재 -> 입석대 -> 서석대(1,100m) -> 반대방향으로 장불재 -> 수만리탐방지원센터 : 6,5km, 3시간 30분
대도시 인근에 차로 30분안에 갈 수있는 1,000m이상의 산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1년 방문객이 400백명, 그만큼 광주시민들이 동네 뒷산처럼 많이 찾는다는 반증이다. 대부분 교통이 편리하여 증심사나 무등산장을 들머리로 등산을 시작하는데 조금 시간을 내 화순 수만리에서 올라가면 한적하고 수월하게 산행을 즐길 수있다.
무등산은 세계유네스코지정 세계지질공원 중 하나이다(나머진 한라산, 주왕산). 주상절리대는 주로 해안가에 있지만 1,000m 이상 고산지대에 있는 것은 무등산이 유일하다. 입석대, 서석대, 그리고 규봉암에 있는 광석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덕분에 대한민국 명승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상 천왕봉은 군사시설이 있어 1년에 두차례만 개방이 된다. 겨울철 나주나 화순에서 광주로 가다보면 저 멀리 정상만 하얗게 눈덮인 무등산이 보인다. 시간이 나면 가야지하는 다짐만하고 항상 시기를 놓치고 만다. 내 뇌리엔 눈 덮인 정상 허리를 안개구름이 휘감아 돌아가는 장면이 박혀있다. 무등산은 겨울산이다. 하지만 가을엔 장불재 억새밭도 좋고 규봉암의 단풍도 좋다.
蛇足) 무등산에 오르고 나서 시간이 나면 국립 518 민주묘지 구) 묘역을 들러보길 권한다. 현 묘역이 완공되기전 초창기묘역으로 당시 안기부직원들이 상주하며 방문객을 감시했었다. 현재는 박관현 당시 전남대총학생회장, 무명열사의 묘, 이한열열사, 이재호열사, 백남기 농민, 독일사람 위르겐 힌츠페터(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등등등 518이후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이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