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는 1786년(정조10년) 충남 예산에서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왕과 혼인으로 맺어져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할 정도로 권세가 있는 집안이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설서(세자에게 經史와 道義를 가르치는 정7품 관직), 시강원보덕(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주재관 종3품)을 지냈다. 45세에 부친 김노경이 윤상도옥사의 배후로 지목되어 전남 고금도로 유배되었으나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고 추사도 51세에 병조참판, 성균관대사성(성균관 총책임자 정3품)을 역임했다.
헌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면서 10년전 윤상도 옥사를 빌미로 55세에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된다.
65세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돌아온다. 이 시기에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 정계에 복귀하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문수양과 예술에 몰두하다 71세에 생을 마쳤다.
추사 제주도 연보 : 1840년 9월부터 1848년 12월까지 8년 3개월동안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1) 1841년(56세) 소치 허련이 찾아와 4개월동안 추사의 집에 기거하며 시서화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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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허련(1809년)의 조상 허대는 선조의 큰아들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임해군의 역모사건에 휘말려 진도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소치는 초의선사의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한다. 초의는 추사에게 소치를 소개하여 소치는 제주 유배기간 중 세번 추사를 찾아가 그림공부를 한다. 추사는 소치에게 중국그림을 매일 한편씩 臨模하게 하고 품평을 했다. 소치는 추사의 예술세계를 토대로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구축하였다.
추사는 허련에게 小痴(조금 어리석다)라는 호를 지어주고 당대 유명한 문인, 예술가를 소개해준다. 추사의 절친 영의정 권돈인을 통해 헌종에게 인정을 받고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 흥선대원군, 민영익 등 당대의 주류 대학자, 예술가, 정치인들과 교류를 했다. 그러나 스승이 세상을 뜨자 48세에 진도에 귀향하여 운림산방을 짓고 그림에 몰두한다. 남종문인화의 종조로 평가받는 소치는 20년동안 추사의 기일에 참석한다. 진도에서 출발하면 충남예산까지는 보름이 걸렸다.
<염철현 brunch.co.kr에서 참조>
2)1842(57세) 유배지에서 부인 예안 이씨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귀양생활의 뒷바라지와 34년의 부부인연을 맺었어도 영전에 가보지도 못한 비참한 심정을 담은 도망시이다.
어찌하면 저승의 월하노인에게 하소연하여 / 다음 세상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날까? /
내가 죽고 당신은 천리 떨어진 곳에 홀로남아 / 당신에게 이 비통한 마음을 알게하고 싶다오 /
3)1843(58세) 추사가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초의는 제주도로 건너가 예안이씨의 49제를 치뤄준다. 초의는 6개월간 제주도 산방굴사에서 정진하면서 추사를 위로하고 추사는 난방도 안되는 동굴에서 정진하는 초의를 위해 초의 독송용 반야심경을 서첩으로 만들어 선물한다. 이 서첩이 추사반야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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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나이 24세에 동지부사인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중국의 대학자 완원의 집에 초대되어 '용단승설차'의 맛을 본 후 그 향기에 차벽이 생길정도로 반하였다. 초의가 다산의 아들 정학연의 배려로 수락산 학림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초의를 찾아간다. 이렇게 첫 인연이 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는 친구인 초의에게 조르듯하여 초의차를 보내달라한다. 그리고 찻값으로 글씨를 써서 보낸다. 그 당시 차는 대부분 중국산이었지만 누구나 초의차를 마시면 매료되었다. 초의차에 대한 추사의 평가이다.
고요히 앉았노라면 /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한 듯하고 /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듯하네 /
<블로그 심영복의 다향에서 발췌>
4) 1843년(58세) 이상적이 만학집, 대운선방문고를 보낸다
5) 1844년(59세) 이상적이 황조경세문편(120권 79책)을 보낸다. 추사는 세한도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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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구하려고 스승 완원에게도 간청을 했으나 번번히 실패한 귀하디 귀한 책이 거친파도를 넘어 귀양지에 도착했다. 이 책을 구하기 위해 북경으로 직접 가려했으나 직전에 역모사건으로 무산되었던 차에 이는 멀리 찾아온 손님보다 더 귀중한 선물이었다.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도 발문에서 발췌해본다.
" 그대가 귀한책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 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권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않고, 바다멀리 초췌하게 시들어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수있다. 추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붓을 든다.
"이보게 우선 이 그림 즐감하시게나!
북풍한설이 온 세상을 덮어 늙고 병든 절해고도의 내게는 아무도 없네. 오직 자네... 푸른 잣나무인 자네의 우정이 있어 난 버틸수있네...그대를 통해 세상을 볼수가 있네..고마우이. 오래오래 우리 서로 잊지말게나"
추사는 長無相忘이라는 큰 도장을 찍어 이상적에게 보낸다.
그림을 본 이상적은 크게 기뻐하며 청나라의 대학자들이 추사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줄 아는지라 그림을 청나라로 가져간다. 세한도를 보고 감명을 받은 청나라학자 16명이 찬사의 글을 남겼다. 그래서 세한도 왼쪽의 발문길이가 13m가 넘는다.
6) 1845년(65세) 제주도에서 해배된다.
추사유배길)
1) 추사유배지 : 유배 초기 포졸 송계순의 집에 머물렀다가 몇 년 뒤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제주지역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 이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그린다
2) 제주추사관 :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건물로 추사의 생애와 서예작품, 세한도 등의 설명이 자세히 되어있다.
3) 두레물 -> 단산 : 단산사에서 30분정도 정상에 오르면 형제섬, 산방산, 송악산, 마라도, 가파도 한라산이 보인다. 바구니모양을 닮았다하여 바굼지오름이라고도 한다.
4) 대정향교 : 추사유배 이전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지만 유배 이후에는 추사가 제자를 가르쳤던 곳으로 늘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라고 강의실인 동재에 의문당이란 현판을 썼다. 동재 위의 소나무(추사송)는 세한도의 소나무와 닮았고
명륜당은 세한도의 집과 유사하다고 한다.
5) 안덕계곡 : 차를 좋아했던 추사가 안덕계곡까지 걸어와(10km) 물을 길러 차를 마셨다고 한다. 추노의 촬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