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년 경기도 남양주에서 아버지 정재윤과 어머니 해남 윤씨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적 성품은 매우 차분하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시절 시를 잘지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8세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카톨릭교인이라 탄핵을 받고 충청남도 해미에 유배된지 10일만에 풀려난다. 31세에 거중기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수원화성 축조에 기여한다. 33세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찰사 서용보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킨다. 후에 서용보는 44세의 젊은 나이에 우의정에 올라 죽을때까지 정약용을 괴롭힌다.
정조가 세상을 뜨자 34세에 신유박해에 휩쓸려 배교를 선택하고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어 강진으로 떠난다. 강진현감 이안묵은 노론벽파로 재임 3년동안 다산을 냉혹하게 대한다. 18년 유배생활 중 강진읍 동구밖에서 8년을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으로 거쳐를 옮겨 후진양성과 저술에 전념한다. 500여권의 저서가 이 곳에서 완성되었으며 대표작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이 있다.
56세에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활동에 힘쓰고 여생을 보내다가 74세에 세상을 떠난다.
다산의 강진 발자취를 따라)
1) 四誼齋 : 강진에 유배되어 왔을 때 주막집 노파가 골방 하나를 내주어 거처로 삼고 4년간 기거하던 곳이다. 사의재란
"네가지(생각, 용모, 언어, 행동)를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곳에서 황상 등 강진 6제자를 지도하며 경세유표, 애절양 등을 집필하였다. 현재 사의재에는 한옥체험 숙박시설과 다산강학당을 군에서 운영 중에 있으며 영랑생가가 지척에 있다.
Book in book) 애절양은 삼정 중 군정의 폐단이 얼마만큼 컸는지 잘 보여주는 수준높은 시이며,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길게 우는 소리 /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해도 / 산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말랐는데 /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
남편이 칼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2) 백련사 : 통일신라 말 창건된 사찰로 천연기념물 동백숲 군락과 야생차밭이 있다. 다산이 43세 때 33세의 혜장이 백련사 주지로 부임해왔다. 다산은 오솔길(40분 소요)로 백련사에 왕래하면서 제자 혜장선사에게 차를 배웠다. 그는 주역에 조예가 깊은 학승으로 40세 젊은 나이에 죽을 때까지 다산과 학문, 차 등 인간적인 교류를 나누었다.
3) 다산초당 : 다산이 유배 7년째 되던 해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山亭에 놀러갔다 경치에 반하여 이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10년동안 다산학단으로 불리우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자료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집필과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한다. 다산초당은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 공간이다. 조선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다산초당의 볼거리로 가. 정석(다산이 바위에 직접 새긴 글) 나. 다조(다산이 차를 마시고 정진한 찻상) 다. 약천(약수로 마셨던 샘물) 라.연지석가산(연못가운데 돌을 쌓아서 만든 산으로 연못에 잉어를 키우고 가장 가까운 방인 관어재에서 물고기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고 함) 마. 서암(다산의 제자들이 공부하던 방) 바. 동암( 다산이 제자를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했던 집무실 겸 공부방)등이 있다.
4) 천일각 : 만덕산에 있는 누각으로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정약전과 정조임금을 그리워하며 강진만을 바라보았던 곳이다. 당시엔 언덕이었으며 후대에 지었다.
5) 다산박물관 : 다산이 생전에 남긴 친필, 간찰, 저술, 주변인물들의 자료를 수집, 전시하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6) 보은산방 : 다산의 나이 44세 때 주막집의 번잡함을 피해 혜장선사의 알선으로 강진읍 뒷산에 있는 고성사의 별채에 거처를 마련했다.
7) 일속산방 : 다산의 제자 황상이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강진군 대구면 천개산 백적동에 일속산방을 짓고 평생 학문에 정진한다. 좁쌀처럼 작은방이란 뜻이다. 그림과 문헌을 통해 위치만 추정할 뿐이다
Book in book) 다산이 사의재에서 제자를 받아 가르치고 있는데 15세의 황상이 찾아와 "선생님! 제가 세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혔으며 세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저 같은 둔재도 공부를 할수 있는지요? 라고 묻자 다산은 "민첩하게 잘 외우는 사람은 제 머리만 믿고 소홀히 넘기며,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제 재주를 못이겨 들뜨려고만 하며, 깨달음이 빠른 사람은 쉽게 깨닫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너는 그렇지 않으니 공부의 재목이다" 라고 격려했다. 황상이 신혼재미에 빠져 있을때는 "당장 짐을 싸라. 절에 가서 공부하고 매일 시 한 수를 지어보내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황상은 시에 최고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추사 김정희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이후 다산이 죽기 며칠전 18년 만에 찾아온 황상에게 규장전운 한권, 붓 한자루, 먹 한개, 부채 한자루, 연배 한배, 여비 두냥을 주며 마지막까지 면학을 당부한다. 황상은 스승의 당부에 따라 一粟山房을 짓고 학문에만 정진한다.
다산이 돌아가신 후에도 아들 정학연과 정황계를 맺고 형제와 다름없는 우의를 지켰다.
8) 기타 강진청자박물관, 가우도 : 고려청자박물관에 들러 고려청자도 공부하고 체험은 덤이다. 나오는 길에 요즘 강진의 핫 플레이스 가우도 한바퀴를 돌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짚라인도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