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2년 경남 의령에서 아버지 곽월과 어머니 전주 강씨 사이에서 세째아들로 태어났다. 친어머니 강씨부인은 그의 나이 세살 때 돌아가시고 계모 허씨의 보살핌으로 성장했다. 외조부 강응두는 의령의 대부호였으며 어머니 강씨부인이 외동딸이었기때문에 아버지는 장인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계모 허씨부인도 집안 대대로 부자인데다 무남독녀인지라 곽월의 재산은 크게 불어났다.
곽재우는 10대 중반에 인근 산음에 정착한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세에 창원의 부호 상주 김씨 집안의 여식(남명의 외손녀)을 아내로 맞이한다. 19세때부터 무술연마에 관심을 기울인다. 장인이 무관출신이기도 하고 지방출신이라 비교적 경쟁률이 낮은 무과를 준비한 듯하다, 야사에 의하면 33세에 대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답안이 선조의 심기를 거슬려 합격이 취소되어 벼슬길을 포기했었다고도 한다. 36세에 부친이 사망하여 3년상을 치루고 농업경영에 힘써 매우 많은 재산을 모았다.
4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에게만 나라를 지키는 일을 맡길 수 없다며 사재를 털어 그해 4.22일 조선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다.(후에 이 날을 의병의 날로 지정) 의병 창설을 위해 처자의 의복까지 내놓은 상황이라 가족은 매부 허언심의 집에 의탁해야만 했다. 첫 전투는 임진년 5월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수송선 3척과 7척을 공격하여 쫒아냈다. 초창기 의병은 물자가 부족하여 관아의 창고를 뒤져 무기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강에 버려진 세곡선에서 군량미를 충당하였다. 문제는 전쟁전부터 지역토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경상감사 김수의 묵인하에 조태곤이 곽재우를 도적으로 오인하고 체포령을 내린다. 이때 초유사 김성일은 곽재우의 의병활동을 공식으로 인정하고 前목사 오운에게 모병업무를 맡게하여 병력을 곽재우아래에 편재해주었다. 그는 나중에 곽재우가 모함에 걸렸을 때도 여러번 변호를 해준다.
이후 왜군이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호남진출을 정암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무산시킨다. 이어 왜군은 방향을 바꿔 경상우도를 거쳐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계획도 곽재우에 의해 좌절된다. 10월에는 진주대첩에 원군으로 참여하여 지속적으로 공을 세운다. 그는 전면전보다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효과는 극대화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조정은 의병장들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곽재우에게 정3품 통정대부의 관직을 내린다. 41세에 성주목사에 임명되면서 경상도 지역의 산성구축과 정비에 많은 공을 들인다. 비변사에서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경상도 각 지역에 산성을 구축하는 총책임을 공에게 맡긴다.
44세에 일본과 강화협상에 불만을 갖고 돌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거의 2년을 초야에서 지내다 47세에 경상좌도 방어사에 제수되어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을 수비한다. 48세에 계모 허씨부인이 사망하자 조정의 기복명령을 모두 사양하고 재야에 머물렀다. 49세에 경상좌병사에 임명되어 산성을 거점으로 한 영남방어대책을 건의하고 50세에 전후복구가 시급한 시기에 붕당정치를 일삼고 군사정책에 소홀하다고 국정전반에 대한 비판을 한 장계를 올리고는 돌연 낙향해버린다. 선조는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다고 대노하고 공을 전남 영암으로 귀양을 보낸다. 이 때부터 도가의 영향을 받아 벽곡찬송(곡식은 먹지않고 솔잎, 밤따위를 조금씩 생식하면서 도를 찬양함)을 시작했다.
2년 후 유배에 풀려 고향 현풍으로 낙향하여 망우정을 짓고 벽곡을 하며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그의 공을 높이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고위직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당시 그 많던 재산을 의병활동에 다 털어넣고 단벌 옷에 교지에 답서를 보낼 종이 한장도 없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
61세에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광해군과 완전 등을 돌렸고 66세에 망우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세를 풍미한 의병장이 남긴 것은 단벌 옷, 거문고, 낚시배 한척이 전부였다.
<물러나 비파산에 살며>
친구들은 속세와 인연을 끊은 나를 불쌍히 여겨 / 함께 낙동강변에 집을 지어주었네 /
굶지 아니하나 다만 솔잎을 씹고 / 목마르지아니하나 오직 맑은 샘물 마시네 /
고요함을 지키며 거문고를 연주하니 마음은 담담하고 / 두견새우는 창가에 앉았더니 생각은 맑고 깊어라 /
염암 여행)
1) 월출산 : 설악산, 월악산과 함께 남한의 3대 악산이며 등반이 힘든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있다. 주봉인 천왕봉(809m)에 오르면 주변이 평야인지라 1,000m이상의 고산에 온 듯한 착각이 들며 탁트인 조망에 정상에는 평평한 바위, 사자봉, 벼랑길, 동굴 등 장관을 이룬다.
등반코스 : 산성대주차장 -> 천황봉 -> 구름다리 -> 천황사 -> 택시로 산성대주차장으로 이동(택시비 만원이내) - 4시간소요
2) 구림마을 :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태어난 2,200년 전통의 마을로 마을이름은 도선국사의 탄생일화에서 유래됐다.
최씨 성을 가진 처녀가 빨래를 하다 물에 떠내려온 외(오이)를 먹고 임신을 한다. 이를 부끄럽게 여겨 아이가 태어나자 숲속바위에 버렸는데 사흘이 지나 가보니 비둘기들이 보호하고 있어 鳩林마을이라 한다.
가. 영암 구림리요지 : 1,000년 이상된 옛가마터
나. 국사암 : 비둘기가 도선국사를 보호했다는 바위
다. 상대포역사공원 :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던 포구로 최치원도 상대포를 통해 당나라로 유학을 간다.
라. 구림한옥체험관 : 간죽정, 죽림정, 조종수가옥 등 한옥과 고즈녁한 돌담길이 있다.
마. 회사정 : 영암구림 대동계의 집회장소로 영암지역 3.1운동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