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의 산방일기
고 요 한 싸 움
쑥부쟁이 보랏빛이 곱습니다. 당신이 가진 미감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 주려고 하느님은 세상에 꽃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옥잠화가 흘리는 달고 은은한 향기, 어둠을 자극적인 향내로 덮는 희고 작은 야래향의 향기 역시 하느님이 지닌 감각이 어느 정도인가를 전해 주려고 우리 곁에 보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꽃 옆에서 저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 때문에 힘들어할까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침은 제게 고요하게 옵니다. 고요 속에서 들끓던 욕망의 높이를 한 옥타브 낮추고, 요와 이불을 개듯 생각도 차곡차곡 개서 제자리에 옮겨 놓고, 티끌과 먼지 같던 일들도 깨끗하게 쓸어내다 버린 뒤 정좌합니다.
그런데 그 고요를 깔고 앉아서 다시 대면하는 것은 청정한 기도와 명상의 평온만이 아닙니다. 다시 만나고 씨름하고 싸우는 것은 늘 욕망의 무사들입니다. 돈을 더 벌어야겠다고 창을 들고 달려드는 병사들,명예가 부족하다고 얼굴을 찌푸리는 부족들, 사랑이 아직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고 매달리는 욕구들을 만납니다. 어제 그것들과 만나 싸웠고 짓눌렀고 쓰러트렸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만납니다.
밀려갔다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다시 몰려오는 밀물 같은 것들과 직면합니다. 버렸다고 생각했던 욕망, 비웠다고 생각했던 욕심을 만나 매일 싸웁니다. 화해하고 용서했는데 미움과 시기가 같은 얼굴을 하고 다시 찾아옵니다.
겉으로 보면 시간의 고요 속에 몸을 담그고 앉아 있는 모습이 청정해 보이지만, 고요의 안쪽에서는 아침마다 싸움의 연속입니다. 어제 싸운 것들과 오늘 또 싸우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입니다. 나도 이렇게 어리석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래된 습성처럼 내 안에 진을 치고 떠나지 않는 그것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수 없습니다.
어쩌면 거기까지가 내 한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그게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수행하는 분들이 붙들고 매달리는 화두나 공안이라는 것도 결국 이런것인지 모릅니다. 아니 내가 고요의 군대를 끌고 가 그것들에게 매일 싸움을 거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길수 없는 걸 알면서 싸우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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