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스님과 왕오천축국전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스님이 지금부터 1300년 전, 저 멀리 인도와 서역 지방을 두루 여행하다 고향을 생각하며 읊은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주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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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스님의 서역기행 노정도. |
오늘날에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감동이 전해온다. 비행기와 열차 자동차로 세계 어디를 누빌 수 있는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편안하게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데 비해 혜초스님이 경험했던 당시의 여행은 한 마디로 고행(苦行)이었다.
7, 8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꼬박 두 발로 걸으며 목숨을 걸고 거친 자연과 낯선 사람들과 싸우며 나아가했던 고난의 길이었기에 고향 땅과 고향 사람들을 그리는 정은 더욱 마음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혜초스님은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승으로 8세기가 시작될 때 신라 불교는 원효와 의상과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의 업적을 토대로 큰 발전을 이뤄 성덕왕대의 빛나는 불교문화를 이룩하고 있었을 때다. 그러나 혜초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공부를 위해 당나라에 유학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던 밀교(密敎)에 심취했는데 7세기 후반기부터 전파된 것으로, 주술적인 의례 등을 통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종교세계를 펼치는 것이었다.
이후 혜초스님은 불교의 본고장 인도에 구법(求法) 여행을 다녀왔고, 733년에 인도 밀교의 대가 금강지 삼장에게서 법을 전해 받고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도 참가했다. 780년에는 밀교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에서 경전을 해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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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원문. |
이 기록들로 미뤄보면 혜초스님은 700년경에 태어나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720년부터 728년경까지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여행한 후 밀교의 고승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780년 이후에 당나라에서 입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5천축국’ 곧 인도에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인데 당시 인도는 다섯 지방,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앙천축으로 나뉘어 있었다.
혜초스님은 720년경에 당나라 서울 장안을 떠나 동남쪽 해안의 광주로 가서 배를 타고 인도로 향했다. 당시 인도로 가는 구법승들은 험난한 사막을 지나야 하는 육로보다 해로를 선호했던 것이다.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로 광주에서 한 달만에 수마트라에 도착으며,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며 더운 기후와 언어를 익힌 후 동인도로 상륙한 것이다.
혜초스님은 먼저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갠지스강 근처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했는데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은 바이샬리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이어 석가모니가 세상을 뜬 곳인 쿠쉬나가라를 순례하고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한 바라나시에 갔다가 두 달이 걸려 중인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불교 유적이 많은 중인도에 대한 서술이 적은데 이로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왕오천축국전은 앞쪽이 상당 부분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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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필사본. |
중인도에서 남인도까지 3개월이 걸렸고, 남인도에서 다시 2개월이 걸려 서인도에 이르렀다. 서인도에서 3개월이 걸려 인더스강 상류의 펀잡지방에 이르렀고, 여기서 1개월이 걸려 지금의 파키스탄 영토에 들어가 탁실라를 지나 카슈미르 지방에 들어갔던 것이다.
카슈미르에서 큰산을 넘어 한 달만에 불교미술이 크게 발달했던 간다라에 이르렀는데 인도에 상륙한 지 5년째 되는 때였다. 간다라에서 북쪽으로 우디야나 등을 지나고 서쪽으로 남파에 이르니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것이다. 그곳에서 계빈 등을 거쳐 바미얀에 이르고 다시 토하라에 들어갔으며 그리고 와칸을 거쳐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를 지나면 중국 땅이다.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로 난 서역북도를 따라 카슈가르와 쿠차를 지나고 계속해서 고창을 지나 서역과 당나라의 문화가 만나 천불동의 화려한 예술을 꽃피운 돈황을 거친 것이다. 그리고 728년경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착함으로써 혜초스님의 8년 동안의 긴 여정은 마무리됐던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에는 이러한 여정과, 여행한 지방을 보고 느낀 점이나 전해들은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앙아시아 각 지역의 불교계 현황과 지역간의 거리를 비롯한 지리 환경, 그리고 풍습과 산물이나 언어 또는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한 예로 중인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길에는 도적이 많은데 물건을 빼앗고 곧 놓아주며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다. 만약 물건을 아끼다가는 다치는 수도 있다. 토지가 매우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없다. 먹는 것으로는 쌀과 떡과 보릿가루와 우유 등이 있고, 간장은 없으며 소금을 쓴다. 흙으로 만든 냄비에 밥을 지어 먹고 쇠솥은 없다.’ 등의 기록들이다.
이 책은 풍부한 시정(詩情)이 담긴 기행문학일 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들로 하여금 당시 상황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사실적이고 종합적인 역사서인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1900년에 중국 문물과 서양 문물이 만나는 비단길의 길목이었던 돈황에서 프랑스인 펠리오(Pelliot)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앞뒤가 떨어져 나가서 227행이 남아 있는 높이 28.5센티미터 길이 358.6센티미터의 두루말이 사본(寫本) 형태였다. 온전한 모습이 아닌 것이 아쉽긴 하지만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으로서 커다란 가치를 지니며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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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승 혜초의 가 쓴 <왕오천축국전>중 파사(지금의 이란)와 대식(아랍)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 오른쪽 밑줄 친 내용을 보면 “다시 토화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에 이른다...... ”와 왼쪽 밑줄 친 “다시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에 이른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
혜초스님이 활동했을 당시 중국에 유학한 신라의 구도승은 180명에 이르렀으며 이중에 다시 인도에 갔던 이는 15명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여행길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명이며 중국이나 신라에 돌아온 사람은 5명뿐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목숨을 내건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혜초스님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이 모든 역경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리고 낯선 땅과 낯선 사람에 대한 다양한 풍경과 순례자로서의 감회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문이자 가장 오래된 책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정밀한 주해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학고재 펴냄)이 나왔는데, 역주자는 1996년까지 ‘무하마드 깐수’로 불렸던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다. 최근 몇 년간 왕성한 연구욕으로 ‘이븐 바투타 여행기’ ‘씰크로드학’ ‘이슬람문명’ 등을 내놓았던 그가 이 책으로 다시 한번 학계를 놀라게 했다.
바로, ‘왕오천축국전’은 어린 나이인 16살에 당나라 밀교승 금강지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는데, 당시 이 여행에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두루마리가 ‘왕오천축국전’인 것이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원본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한 것으로, 8세기 후반 황마지에 쓰인 필사본이다. 이는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으로 당시 그 지역의 정치 문화 풍습 종교 등을 알려주고 있으며, 당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불교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그러나 이 책은 외국인이 먼저 발견했듯 연구도 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이 ‘돈황석실유서’에 수록한 뒤 일본 독일 등지의 학자들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으며 1986년에는 구와야마 쇼신 등 19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연구반이 5년 동안 연구해 ‘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를 펴냈다.
국내에서도 최남선, 고병익, 김규성, 정병삼 등이 우리말 번역본을 내놓았지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처럼 정밀 주해서가 나온 것은 처음이라 한다.
‘왕오천축국전’을 세계 4대 여행기(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오도리크의 ‘동유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중 하나로 꼽는 이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책을 연구하거나 기리는 일에 너무나 불초스러웠던 것이다. 남들보다 한참 뒤처져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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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국 서안시 주지현에 세워진 ‘신라국혜초기념비’. |
정수일 교수는 ‘왕오천축국전’이 원래 세 권으로 돼 있었다는 당나라 승려 혜림의 ‘일체경음의’의 기록이나 이 책에 주석된 85개의 어휘를 비교해볼 때 현존 두루마리가 세 권의 원본을 축약한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동안 이 책이 언어표현이나 문법구조상 평가절하됐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에서 대학교수를 지냈던 정수일 교수는 혜초에게서 자신의 바람을 길어올린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즉, 혜초스님은 경주 금성을 출발하여 중국의 평주와 광주를 거쳐 베트남 → 싱가포르 → 인도네시아 자바섬(불서국) → 말레이시아 → 미얀마 → 방글라데시의 앞바다를 경유하여 동천축으로 진입하였다. 이어 그는 인도의 불교 성지인 왕사성 → 구시나가라 → 바라나시 → 마하보디 → 바라나시에 들른 뒤, 다시 카냐쿱자-나시크를 거쳐 알로르(아프가니스탄) → 잘란다라 → 탁샤르 → 신드구르자라 → 탁샤르 → 잘란다라 → 카슈미르(파키스탄) → 간다라 → 우디아나 → 치트랄 → 우디아나 → 간다라 → 람파카 → 카피시 → 자불리스탄 → 바미얀(아프가니스탄) → 토카리스탄 → 파사(이란) → 니샤푸르 → 토카리스탄 → 와칸 → 파미르 → 카슈카르 → 쿠차 → 언기 → 돈황 → 난주 → 장안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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