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유배생활만 22년, 천하제일 시인이 되다" 소재 노수신의 길을 따라

김성완의 블로그 2021. 7. 21. 18:18

  노수신은 중종 10년에 태어나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시를 잘 지었다. 29세에 식년문과에 초시,회시,전시 모두 장원급제를 하고 시강원사서가 되어 퇴계 이황과 함께 세자(명종)에게 강론을 하고 중종이 승하하자 행장을 지을만큼 글솜씨가 뛰어났다.

31세 때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영의정 이익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는데 이일이 기나긴 유배의 단초가 된다. 중종말 조정은 윤임과 윤원형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노수신은 이조정랑을 역임하면서 사림파인물을 많이 등용시킨다. 인종이 즉위 후 8개월만에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외척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노수신을 충주로 3년 후 전라도 순천을 거쳐 진도로 이배시켜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가 시작된다.

 

  주자의 책에서 "내가 내책을 읽으니 병이 낳을 것같다"는 글에서 소재라고 스스로 호를 짓고 참기힘든 귀양살이를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한다. 그는 당대의 대학자 이황, 김인후, 기대승과 서신을 통해 성리학의 이론을 토론하고 "인심도심변"이라는 이론을 완성한다. 또한 우매한 백성을 예로 교화시켜 지금도 진도개화지조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는 고단한 섬 귀양살이를 이렇게 읊었다.

나그네 나그네, 호는 암실이니 / 바다 섬에서 가진 것은 두 무릎뿐이니 / 어째서 쓰도 못할 칠나무를 스스로 베었던가/

관 뚜껑이 덮어야 인생사 끝나는 것을 / 뱃속의 기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 아! 첫째노래여 미친 나의 노래여 /

희미하던 등불 날 위해 다시 불 피우네 /

그는 생전에 1,449수의 시를 남겼으며 이 중 1,023을 진도에서 썼다. 허균은 노수신의 오언율시는 우리문학 1천년 역사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칭송하였다.

 

53세 때 문정왕후가 죽자 조정에 복귀하여 홍문관 교리를 시작으로 70세에 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권율과 이순신을 추천한 장본인이었으나 73세때 정여립이 역모를 일으키자 그를 추천하였다하여 파직되어 76세에 세상을 떠난다.

 

  오랜귀양살이(22년) 후 제상을 16년을 하였으나 도무지 말이 없었다. 젊어서 영의정을 파직시켰던 결기는 사라지고 매일밤 술한병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오랜 귀양살이가 사람을 부드럽게하고 적을 만들지 말라는 처세를 체득했는지도 모른다. 진도에서 귀양살이 할때 그를 심하게 박대했던 고을 수령을 후일 노사신이 고위관직에 올랐을때 주위에서 그를 벌하도록 청하였으나 그를 감싸주었고 결국 파직이 되자 몇년 후 풍천부사에 부임케 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유배생활 중 자신이 죽는 꿈을 꾸고 묘비명을 미리 지었다.

다섯해를 바닷가 나그네가 되고 / 하룻밤에 가지 못한 곳이 없네 / 종복은 내 검은머리 덮어주고 / 관리는 시신을 검안하겠지 / 불혹의 나이에 요절은 아닐게요 / 속인 일 없으니 형벌과 죽은 것은 아니리라 / 다만 통곡할 바는 늙으신 부모를 세상에서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

 

 오랜 귀양살이를 한 곳이지만 그 곳이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 안치마을 이라고 추정만할 뿐 흔적은 없다. 그의 유적은 마지막 유배지인 충북 괴산(수월정)에 남아 있다.

<벽파정>

저녁노을을 따라 진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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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저녁노을을 보려면 날짜를 잘 골라야한다, 도리산 전망대를 3번을 갔어도 노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세방낙조도 5일간 출장기간에도 구름만 끼어 있었다. 운도 따라야한다. 그리고 일몰시간을 정확히 알고 시간을 맞추어 가되 해지고 나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을 있어야한다. 그래서 나는 일출을 더 좋아한다. 관매도에서는 동네수퍼에서 집 막걸리를 찾아보시길(아직도 있을런지 장담은 못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