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의 끝판왕, 행동하는 지성" 면암 최익현의 길을 따라
면암은 순조시대 경기도 포천에서 가난한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함을 안타까이 여긴 아버지는 그의 나이 13세때 경기도 양평으로 귀양와 있던 성리학의 대학자 이항로에게 보낸다. 당쟁으로 벼슬길에 관심이 없던 다른 문하생과는 달리 면암은 22세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26세), 예조좌랑(31세), 성균관 직강(32세), 사헌문 장령(35세)의 관직을 거친다.
35세 때 흥선대원군의 경북궁 중건을 비판한 상소를 시작으로 일생동안 36개의 상소를 올릴정도로 꿋꿋한 선비의 길을 간다. 40세 때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가져온 계유상소로 제주도로 유배를 갔으나 고종의 절대적 신임으로 1년반만에 풀려난다. 제주도 유배생활은 곧 돌아갈 조정의 실력자인지라 지역사람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하고 해배 후 한라산 백록담여행을 자랑할 만큼 궁핍한 생활은 아니었던 것 같다.
43세 때 조일수호조약인 강화도조약체결에 반대한 "도끼를 지니고 대궐문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한다" 라는 제목의 강력한 상소를 올려 흑산도로 유배를 가 3년 뒤에 풀려난다. 흑산도 유배생활동안 진리마을에 일신당이라는 서당을 열어 후학양성에 매진하였고 지장암이라는 바위에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독립된 대한제국이다"라는 뜻의 "기봉강산 홍무일원"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52세 때는 개화파의 처단과 의복제도 복구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단발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체포되었다. 그후고종은 호조판서의 관직을 내렸으나 거절을 하고 20년동안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72세 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 조약의 무효와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73세의 고령의 나이에 전라도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면암의 두터운 신망으로 전라도 정읍 순창등지에서 의병 800여명이 운집할 정도로 세가 늘어났으나 실지 무장병력은 200여명에 불과하였다. 의병을 해체하라는 고종의 칙서와 같은 민족간 피를 흘릴 수없어 의병을 자진해산하고 체포된다. 이 일을 기화로 일본 대마도로 유배를 갔으며 "일본인이 주는 쌀은 한톨도 먹을수 없다"고 단식으로 항거하다 옥중에서 병사한다. 그의 운구가 부산에 도착하자 수천명의 인파에 둘려싸여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으며 면암의 묘도 청양에서 논산 상월면으로 이장했다가 너무 많은 조문객이 모인다하여 연고도 없는 예산 광시면으로 이장하였다. 총독 이토히로부미는 조선수군 3만보다 면암이 더 무섭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년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에 대응하여 NO JAPAN운동을 시작한지 2년째 되는 날이다. 유명 의류매장은 철수하고 수입맥주, 자동차 매출이 급감하고 핵심산업 부품의 국산화가 이루어진 효과도 있었지만 게임관련기기, 골프채의 수입은 늘어났다는 후문이다. 아직도 독도 영유권, 위안부배상에서부터 역사교과서 왜곡, 소녀상 철거까지 해결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산적해있다. 면암선생이 보여준 호국정신의 1/10만이라도 온 국민이 보여준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것만 같다.
배로 가는 당일치기 한라산 등반)
제주도를 가는 방법으로 대부분 비행기편을 생각하지만 자정에 출발하는 배편을 이용하면 잠을 좀 설치는 대신 새벽에 도착하기 때문에 하루를 절약할 수 있다. 편의상 목포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계산하였다
제1안 백록담) 목표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0시30분출발 -> 제주항 06시도착 -> 택시로 성판악이동(사전예약 필요 하루1,000명 탐방제한) -> 진달래밭대피소 -> 백록담 -> 관음사주차장(18Km, 9시간 소요)
제2안 영실코스) 목표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0시30분출발 -> 제주항 06시도착 -> 택시로 또는 버스(240번)로 영실주차장이동(사전예약은 없음) -> 윗세오름 -> 남벽분기점 -> 돈내코주차장(11Km, 4시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