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짧고 굵직하게 개혁의 아이콘" 정암 조광조의 길을따라

김성완의 블로그 2021. 7. 17. 11:41

  조광조는 조선 성종때 감찰이었던 조원강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학문에 대한 욕심도 컸다

16세때 평안도 영변의 지방관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 곳에 유배와 있던 김굉필의 제자가 된다. 벼슬에는 큰 뜻이 없어 성리학에 매진하여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맥을 이어받았고 요순시대의 이상정치인 도학정치를 꿈꾼다.

 

33세때 뒤늦게 특별과거인 알성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중종의 눈에 띄면서 3개월 후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다. 이때

상소를 올린 두 신하를 벌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들을 두둔하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사간원 전원을 파직하라는 주장을 관철시켜 하루아침에 사림의 영수로 존경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중종은 반정공신의 힘을 빼기 위해 조광조를 신임하게 된다. 36세때 대사헌(현 검찰총장)에 임명될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하여 조정의 실력자로 떠오르면서 백성이 골고루 잘살기 위한  토지제도의 개혁,  도교서당인 소격서를 폐지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주도하면서 중종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37세때 과거제도의 대안으로 추천과 면접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현량과를 시행하였으나 정작 선발된 28명은 조광조계의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해 중종반정의 공신 중 부당하게 공신이 된 사람의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하여 공신 3/4의 위훈을 박탈하여 반정공신들과 대립하였고, 그로부터 4일후 반정공신이 기묘사화(주초위왕을 나무잎에 새겨 역모로 모함)를 일으켜 조광조는 전남 능주로 귀양을 간다. 사릿문과 방문을 열어놓고 조정으로의 복귀를 염원하였으나 한달 후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비록 개혁에는 실패했으나 바른 정치를 표방하고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았으며 율곡 이이 등 후학의 모범이 되었다.

 

사약을 받고 쓴 절명시>

 임금을 어버이같이 사랑하고 나라걱정을 내집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없는 내마음을 비춰주리라.

 

뒷 이야기)

- 과거급제 동기인 화순사람 양팽손은 조광조가 유배되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파직당하여 고향 능주로 내려왔다. 고향에서 조광조와 재회하여 서로 의지하며 한달 남짓 생활을 하였으나 조광조가 죽자 친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멸족의 위험을 무릎쓰고 제사를 지낼 큰 아들은 놔두고 둘째아들과 함께 화순 쌍봉사 계곡에 정암의 가묘를 만들어 제자들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후일 선조1년(1568년) 조광조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죽수서원을 세워 조광조, 양팽손을 함께 제향하고 있다.

 

- 제자 박상은 조광조의 운구를 보고

  "누가 알았으랴. 남대(사헌부)의 옛 자의(붉은 옷)가 소 달구지를 타고 초라하게 고향에 돌아갈 줄을/ 후일 지하에서 서로 만날때는/ 인간사 그릇됨을 말하지 말세"라는 시를 남겼고

 

 - 한국 3대민간 정원의 하나인 담양 소쇄원의 주인장 양산보(1503 ~ 1557)는 15세 때 조광조의 제자가 된 후 17세 현량과에 최연소자로 급제하였다. 그해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소쇄원을 짓고 은거하였다.

 

 빡세게 당일치기 화순여행)

  세량제(물위에 반사되는 산 벚꽃으로 유명한 출사지이나 새벽 물안개 피어나는 것도 장관임) -> 천불천탑의 신비 운주사(2시간) -> 조광조 유적지 -> 환산정 -> 화순적벽(사전예약) -> 너릿재 옛길( 1시간)

<운주사 와불>

화순 이서면 적벽

<가을 너릿재 옛길>